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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위안부·강제노역 등 과거사 문제 해결 촉구 목소리



(한국안전방송) 14일 아침 755분 출근길 시민들에 섞여 151번 버스를 탄 박원순 시장이 왼쪽 두번째 좌석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보고 반색했다. 버스회사 동아운수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일본대사관 앞을 지나는 버스에 소녀상을 싣고 달리는 첫날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겪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입 밖에 내기조차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해방 후 수십년 동안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 책임을 부정했고 한국 정부는 외면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편견 탓에 수많은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숨기고 살았다.

 

1991814. 당시 67세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최초로 당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 증언했다.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신문과 뉴스에 거짓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결심을 단단히 했다. 바로잡아야 한다"며 군인들에게 연행된 사실과 참혹했던 위안소 생활을 폭로했다.

 

1990년 이후 국내 여성단체 등은 한국과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가 한 일이고 군 관여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 조사도 하지 않는 등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상황이었다.

 

김 할머니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때 결국 그 사람한테 처음으로 강간을 당하는 그 참혹한강제로 옷을 다 벗기고"라며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절대 이것은 알아야 한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라고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1924년 만주 지린성에서 태어나 평양에 살다가 우리 나이 17세에 일본 군인에 의해 위안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많게는 하루 7~8명의 군인을 상대하며 비인간적인 생활을 했고 반항을 하다 맞기도 일쑤였다. 일본 군의가 정기적으로 찾아와 건강을 검사하고 주사를 놓곤 했다는 할머니의 증언에서는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다.

 

김 할머니는 5개월 뒤 조선인 은전 장수를 따라 보초병의 감시를 피해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일본군 '위안부'라는 족쇄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탈출을 도왔던 은전 장수 남편은 술에 취하면 아들 앞에서도 "더러운 년이다" "군인들한테 갈보 짓을 했다"며 가슴에 비수를 꽂는 소리를 했다.

 

김 할머니는 1997년 생전 뉴스타파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젊을 때는 부끄러운 생각부터 들어서 이렇게 나오지도 못했다""남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일본 군대에 끌려가서 '위안부' 노릇을 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기가 막힌 일이지"라고 말했다.

 

"그것을 한국에서 알면 상부에서라도 (대응을) 해줘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갔다 온 사람을 아주 천하게 생각하고 상대를 안 하려 하고 가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밤낮 숨어서 울기나 했지 말할 데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 우리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라고 토로했다.

 

김 할머니는 1991년 공개 증언 이후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해 12월엔 징용·징병 피해자들과 함께 도쿄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1월부터는 시작된 정기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1995년엔 일본군 '위안부'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은 그토록 모질었던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됐다. 우선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개 증언이 잇따랐다. 생존자들의 증언은 역사복원에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직시하고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도록 하는 힘을 발휘했다.

 

바라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잘못했다" 소리를 듣는 것뿐이라던 김 할머니는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19971217일 폐질환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김 할머니는 떠났지만 과거를 직시하고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살아남았다.

 

2012년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각국은 김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발한 날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814일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9일 제5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2017 김학순, 다시 태어나 외치다'란 부제로 제세계연대집회 겸 1295차 정기 수요시위를 열었다. 집회에 참석한 1000여명의 시민들은 김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와 정신을 기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연대할 것을 다짐했다. 기림일인 81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오후 3시에 기림일 미사, 오후 6시에 '나비, 평화를 노래하다' 문화제가 열린다.

 

정부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달 31'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를 출범시켰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달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지정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연구소 설치 및 국립 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는 생전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는 생각이 든다'고 서글프게 읊조렸다. 하지만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할머니의 삶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참상을 기억한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고백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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