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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대왕의 리더슆

알렉산더대왕의 리더슆

알렉산더는 인적자원을 활용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만 명에 달하는 병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병사
와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잠을 잤다. 그는 항상 소박한 식단을 즐겼
고 추운 곳에서 잠을 청했다. 

항상 최일선에서 병사를 이끌었으며 그들과 함께 싸우다 부상을 입는일도 잦았다. 의사교육을 받은 그는 전투
가 끝나고 나면 몸소 병사들의 상처
를 치료해 주었다. 

자신이 큰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병사
들의 상처를 먼저 돌보았으며,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병사들이 다 치료를 받고 난 후에야 치료를 받았다.

《알렉산더》 마케도니아의 왕
(BC 356-BC 323, 재위 BC 336-BC 323)마케도니아라는 작은 국가의 왕으로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
하고 그리스문명을 인도와 아프가니
스탄까지 전파했던 알렉산더는 세련
된 정치가이자 능숙한 전략가이며 잔인한 전사였다.

몽테뉴는 `가장 탁월한 사람들` 
이라는 글에서 알렉산더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통찰력, 인내심, 치밀함, 관대함, 낙천성과 같은 군인적 자질들과 그가 누린 영광
스러운 기간과 영토, 잘못을 인정하는 순수한 의지 등은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세련된 정치가이자 능숙한 전략가
이며 잔인한 전사였던 알렉산더는 한마디로 영웅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프랑수아 슈아르는 저서  `알렉산더` 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신화로 남은 한 사내를 조명한다. 

단순히 그의 삶만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사후 어떻게 신화가 되어갔는지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알렉산더는산화가
될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알렉산더의 구체적인 업적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전쟁 중에도 법을 만들었고 상업로를 개척해 알렉산
드리아를 비롯한 도시들을 세웠다.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는 무수히 많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성기 무렵 남부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가 무려 60개가 넘었다. 

이 도시들은 이름은 바뀌었지만 지금
까지도 도시로서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곳들이다. 알렉산더는 지적이면
서도 치밀한 근거 위에서 전쟁을했고
통치를 했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북서부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이룩한 군주"

“앞으로 그대가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수신인을 아시아의 대왕으로 할 것이며, 나와 동등한 입장으로 편지하지 마시오! 당신의 소유였던 것은 이제 모두 나의 것이니,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한다면 예의를 갖춰 내게 물으시오!

행여 그대가 나와 맞서 싸우려 한다면 나중에 도망가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당신이 어디로 피신
하든 나는 당신을 찾아낸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보낸 협상 제안 편지에 대한 알렉산더의 답장 중에서)

1.부모에게 물려받은 ‘냉철한 실리주의’와 ‘격정적 신비주의’
오늘날 우리가 접 할 수 있는 알렉산더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는 역사와 전설이 버무려져 있다. 그에 관한 갖가지 전설들은 북쪽으로는 아이슬란드부터 동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유포되어 있다. 

가능한 한 전설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의 삶을 이야기 하려면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스
의 유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탁월한 군사지도자이자 냉철한 실리주의자였다. 

이에 비해 올림피아스는 신비주의적
이고 격정적인 성향의 여성이었다. 알렉산더는 양친의 이러한 다분히 상반되는 성격을 모두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더는 13살 때부터 약 3년 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우
면서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마케도니아는 혈통상 그리스에 속하면서도 문화나 기풍 면에서는 그리스와 차이가 있었고, 그리스인
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멸시하곤 했다. 

알렉산더가 예술가, 지리학자, 측량 기사, 수로학자, 동식물학자 등을 원정길에 데리고 간 것도 스승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원정길에서 수집한 자료가 스승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알렉산더가 태어날 무렵 그리스는 한 세기 전 페리클레스 시대의 전성기를 보내고 페르시아의 간섭, 잦은 전쟁, 선동적인 정치가들의 발호, 농업생산기반 쇠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으며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는 기회였다. 필리포스는 카이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338년)에서 아테네와테베를
패퇴시키고 코린토스 동맹을 이룩한 뒤 그리스 세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살해당했고, 20살 나이의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했다. 북방 이민족의 침입과 서쪽의 반란을 진압한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 봄 아시아 원정을 개시했다.

2. 이집트,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계속해서 진군하다.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보병 3만에 기병 5천 규모였으며, 알렉산더는 주력 기병, 창기병, 투창병, 궁수, 중무장 보병, 경보병 등 다양한 부대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운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원정대는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고 소아시아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333년 11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섬멸했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겨우 탈출 할 수 있었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더는 그리스 후방을 위협 할 수 있는 페니키아 해안의 함대 기지를 점령해 철저히 파괴해 버렸고,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발하던 이집트를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 알렉산더의 결혼식
그는 이집트에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상업과 행정 중심지 구실을 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강물이 실어오는 침적토가 쌓이지 않는 나일강 하구 서쪽 끝에 자리하게 된 이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더는 기원전 331년 10월 티그리스 강 동쪽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다시 결전을 벌였다. 철저하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몇 달 뒤 파르티아 사막에서 자신의 친척인 박트리아의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더는 최대의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를 정중하게 장사 지내주었다. 이로써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전쟁에서 공도 세운 필로타스의 반란 음모를 해결하고, 기원전 329년 봄 박트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그리스 기병대가 알렉산더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
가는 큰 위기가 발행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아시아인으로 편성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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