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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운동의 역사적 재조명

3.1운동은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설움 가득한 외침은 또 다른 해외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준 울림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3.1운동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재언) 

1919년 3·1운동 직전에 촬영된 탑동공원(탑골공원)의 팔각정.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천제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본떠 세운 건축물이다.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  (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기독교 감리파 대표 이필주(1869∼1942)도 덕수궁 옆 정동교회 사택에서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을 위해 마지막 가족 예배를 올렸다.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인 김창준(1890∼1959) 역시 거사의 길을 나섰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되는 어린 아내와 노부모의 생계가 걱정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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