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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한국은 지금 신 냉전 시대로 가고 있는 대외적 환경의 불확실성이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

♥정치에서 도덕이란 外皮를 찢어버리다♥

 

 

중국에 한자로 ‘예(豫)’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예는 바로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을 말한다. 성의 대부분이 황허(黃河)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허난성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야생코끼리가 많았고 사람이 코끼리를 끌고 다니는 지역이라고 해서 나 여(予)와 코끼리 상(象)자를 합쳐서 예(豫)로 했던 것이다.

삼경(三經)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서는 우(禹)임금이 천하를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누었을 때 구주의 가운데를 예주(豫州)라 하였다는데 과거의 예주가 오늘날 허난성이다. 그 땅이 천하의 가운데라서 중주(中州)라고도 불렀는데 보통 이 지역은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다.

‘중원’이라고 하면 중국 땅을 일컫는 말로 변했지만 본래는 이 허난성 지역만이 중원이었다. 카이펑(開封)과 뤄양(洛陽), 그리고 조조(曹操)가 수도로 삼았던 쉬창(許昌) 모두 중원이었다. 중국인 그들이 생각한 세계의 중심이었다.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주장한 한비자(왼쪽)와 마키아벨리.

중원, 선망의 땅 그리고 고난의 땅

 

중국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상하이(上海)나 베이징(北京)이 아닌 시안(西安)을 권하는 편이다.

그리고 허난성 정저우(鄭州)와 안양(安陽)도 추천하는데,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의 1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에 가고, 5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에,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에 가야 한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허난에 가야 한다.”

 

허난은 앞서 말한 대로 문명이 시작된 땅이다. 중국 최초의 왕조 은(殷)나라의

땅이 아니었던가? 은으로 대표되는 중국 역사가 시작된 그 땅에는 운명이 있었다.

바로 고난이라는 운명!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천하의 중심이었다.

자연히 많은 강자(强者)가 그 땅을 탐낼 수밖에 없었다. 강자들이 선망하는 땅. 그 땅은 결국 힘들이 맞부딪치는 각축장(角逐場)이 되고야 말았다. 춘추(春秋)시대 때 정(鄭)나라의 사정이 늘 그러했다. 중원은 은의 땅이었다가 춘추시대가 열린 후 정나라가 주(周)의 동천(東遷)에 따라가며 그 땅을 정의 땅으로 취했다. 서주가 망하고 나서 주왕실이 동쪽으로 천도를 할 때 정나라는 그 혼돈의 시기에 일찍이 운신을 해서 중원에 터를 잡아 개척했는데 혼란한 시기에 그 노른자 위치를 선점했다고나 할까?

 

사통팔달의 요지를 소유한 정은 춘추시대 초기 빛을 내던 나라였다. 특히 정 장공(莊公)의 위세는 대단했다. 제(齊) 환공(桓公), 진(晉) 문공(文公), 초(楚) 장왕(莊王), 오(吳) 합려(闔閭), 월(越) 구천(句踐)을 보통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한다.

제 환공을 춘추패자의 선두주자라고 하지만 정 장공을 첫 번째 패자라 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로 정나라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정의 전성기는 너무도 짧았다. 정 장공 이후 세(勢)는 급격히 줄었다. 그러자 사방의 신흥강국들이 정이 선점한 땅, 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나라는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열강의 침입과 간섭, 간접지배에 신음해야 했다.

“정나라는 앞으로 나가도 뒤로 물러나도 죄가 된다.”

 

“하늘이 정나라에 화를 내린 지 오래다.”

 

“큰 나라 사이에 끼여서 무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이 어찌 죄가 되랴.”

 

《좌전(左傳)》에 나오는 말들이다. 정나라 형편이 이러했다. 나라는 작고 국력은 약했다.

그런데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득시글거렸다. 남쪽에 초, 북쪽에 진이라는 양대 강국 사이에 끼여 핍박을 받았다.

 

이 정나라에서 유가(儒家)도 존경하고 법가(法家)도 모두 존중한 대정치가가 등장했다.

그가 바로 자산(子産)이다. 그는 정나라 국정 운영의 원칙들을 단 두 마디로 설정을 했다.

 

먼저, 폐기외(閉其外). 밖에 있는 강대국들에 맞서 자신을 지키자는 것이니, 국방과 외교 모두 단단히 하자는 것이다.

 

둘째, 수기내(守其內). 안으로 질서를 잡자는 것이다. 법으로 명확히 질서를 잡아 힘을 어떻게든 조직해야 했다.

 

폐기외와 수기내는 자산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선택된 노선에 가까웠다. 폐기외는 외교일 것이고 수기내는 법치(法治)였을 것이다. 자산의 원칙을 보면 어찌하여 이 땅에서 유세의 달인들이 나왔고, 법가 사상가들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산이 활약했던 정나라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춘추시대까지였다.

 

그리고 중원에 새 임자가 들어왔다. 바로 한(韓)나라이다. 북방의 강국 진의 3분(分)을 춘추시대의 종료이자, 전국(戰國)시대의 시작으로 보는데, 진은 한, 위(魏), 조(趙)로 갈라졌다. 진의 삼 분 이후 얼마 안 가 한은 정나라를 멸망시켜 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정을 취한 한은 정의 영토만이 아니라 운명까지 취하게 되었다. 고난이란 운명을 등에 지게 되었는데 정나라처럼 강국의 침입과 압박에 신음을 하게 되었다. 그 고난이 불세출(不世出)의 사상가(思想家)들을 배출해낸다.

 

 

고난의 땅이 낳은 縱橫家들

 

귀곡자(鬼谷子)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있었다. 외교와 유세(遊說)의 아이콘이 된 사람인데 그가 바로 장의(張儀)이다. 장의는 학업을 모두 마치고 귀가한 이후, 여러 개의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열심히 유세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초나라로 가서 그곳의 재상과 술을 마셨는데 그만 재수 없게도 그 자리에서 초나라 재상이 아끼던 귀중한 벽옥(碧玉)이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재상의 빈객(賓客)들은 모두 그 유세객을 의심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저자는 가난했고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그러니 벽옥을 훔친 이는 저자가 아닐까 의심을 샀고, 결국 빈객 장의는 매를 호되게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때려도 장의는 아니었기에 절대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에는 매를 대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집으로 돌려보냈고 장의는 영락없이 반송장이 되어 귀가했다. 처참한 장의의 꼴을 본 그의 아내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책을 끊고, 유세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농사나 지을 것이지… 괜히 송사리가 용 노릇 하겠다고 하니까 험한 꼴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장의는 아내의 이 말을 듣자, 생뚱맞게도 이렇게 물었다.

 

“내 혀가 있는지 좀 봐주시오. 아직 있습니까?”

 

이에 아내가 있다고 말하자, 장의는 껄껄 웃으면서 “그럼 됐소”라고 답했다.

아무리 몸뚱이가 어떻게 되든 간에 자신에게 혀만 남아 있다면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했나 보다.

장의는 연횡책(連橫策)으로 천하를 흔들었고, 소진(蘇秦)과 더불어서 합종연횡책(合縱連橫策)으로 기억되는 전국시대 최고 스타 중 한 사람이다. 외교에 능한 사람들, 때론 외교를 위해 사술(詐術)도 쓰는 사람들, 세 치 혀를 가지고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사람들을 종횡가(縱橫家)라고 하는데, 중원은 종횡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라가 작고 힘이 없으니 외교에 능할 수밖에 없다. 강대국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니 절로 배우고 익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고 때론 사술도 써야 했을 것이다

.

法家의 고향

 

중원은 외교의 전문가만을 낳은 게 아니라 법가 사상가들도 낳았다. 법가 사상가의 등장 첫 번째 시작은 앞서 언급한 자산이었다. 그는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만들어 공개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유언(遺言)을 후계자에게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이 우리 정을 다스릴 것인데 그때 반드시 엄한 자세로 사람을 다스려야 할 것이오. 불은 형상이 무섭기에 불에 데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물은 약해 보이기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반드시 엄격한 태도를 보이시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이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에게 물로 보이지 마라. 불로 보여라. 엄격한 법치로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나라에 질서가 잡혀 결국 사람들이 다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당부와 경고를 한 것이다. 그렇게 엄하게 다스려야만이 중원에 터 잡은 정나라가 반드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원이란 땅이 법치를 강제한 것인데 살아남고 싶으면 법으로 다스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중원은 자산의 후계자들을 낳는다. 오기(吳起), 상앙(商鞅)과 한비자(韓非子), 이사(李斯)…. 이 법가 사상가들은 모두가 중원이 낳은 기재(奇才)들이다. 법가 사상의 대표자인 상앙과 한비자의 텍스트를 보면 유난히 ‘반드시 필(必)’이라는 글자가 많이 등장한다. 상앙의 텍스트 《상군서(商君書)》에는 176번, 한비자의 텍스트 《한비자》에는 555번이나 나오는데, 중원 사람이라 그렇다. ‘반드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정치의 방법’ ‘반드시 나라가 부유해지는 정치의 기술’ ‘반드시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정치적 대안(代案)’ 등을 늘 고민했기에 그들의 글에는 자연히 ‘반드시’ 가 많아진 것이다.

 

1494년의 재앙

 

이탈리아를 침공, 르네상스 시대의 종언을 알린 프랑스 왕 샤를 8세.

 

 

그들만큼이나 ‘반드시’를 고민하고 좋아했던 사람이 서양에도 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다.

 

중원이란 환경이 외교가들을 만들어냈다고 했는데, 마침 마키아벨리도 외교관으로 활약을 많이 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겪어야 했던 사유(思惟)의 환경이 중원과 유사했는데, 그 역시도 고난의 땅이 낳은 사람이다.

 

1494년 전에 이탈리아 반도에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른바 ‘로디의 평화’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피렌체·베네치아·밀라노·로마교황청·나폴리의 5대 지역 강국 사이에 세력균형(勢力均衡)이 유지되고 있었다. 압도적 힘이 부재(不在)한 가운데 제법 힘의 균형이 잘 유지가 되고 있었는데 1454년에 체결된 로디의 약속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1494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의 침공 때문이었다. ‘저승사자’가 이탈리아 반도에 등장했다. 바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다. 샤를 8세가 나폴리공국(公國)을 친다는 명분으로 4만명의 숙련된 병력과 당시로서는 첨단의 군(軍) 장비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저승사자의 등장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가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이탈리아에 여러 열국(列國)이 있고 그들이 예술과 철학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해주며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꽃피웠는데 그 좋은 시절이 끝이 난 것이다.

 

당시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나폴리왕국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이렇게 1차 이탈리아전쟁이 발발하며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외세에 유린당했다. 고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스페인도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1512년 에스파냐군의 침공으로 프라토를 방어하던 2000명의 피렌체 민병대가 살육당했다. 도시는 약탈당했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열국은 막강한 제국 군대에 먹잇감이 되었고 외세에 짓밟히기만 했다.

 

“프랑스의 샤를 왕은 백묵 한 조각만으로 이탈리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군주론》 12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실토했는데 현실이 그러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494년 토스카나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침공과 그로 인한 메디치 정부의 붕괴, 그리고 뒤이은 피렌체의 정치혁명으로부터 시작해 1512년 에스파냐군의 침공까지 시간적·정치적·지정학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비르투

 

〈나는 운명의 여신을 이러저러한 사나운 강들 가운데 하나에 비유한다. 강들이 격분하면 평야를 호수로 집어삼키고 나무와 건물을 파괴하고 땅을 들어 이쪽저쪽으로 옮겨 놓는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닥치기 전에 도망가고 그들을 저지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들의 힘에 굴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온한 시기에 인간들이 미리 도랑을 파고 제방을 세움으로써 홍수가 일어났을 때 불어난 강물을 수로를 통해 흐르게 하거나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지 못하게 해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군주론》 25장)

 

홍수가 나고 땅이 들고일어난다. 재앙에 가까운 자연재해다. 그가 생각했던 조국 피렌체의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운명에 순응하고 말 것인가? 아니다. 고난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 위 《군주론》 25장에서 말하지 않는가? 도랑을 파고 제방을 쌓자고. 홍수가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강물을 흐르게 하고 수로 안에서만 놀게 해서 피해가 없게 하자고.

 

마키아벨리는 ‘운명’이라는 ‘포르투나(Fortuna)’와 ‘네체시타(Necessita)’라는 불가피함을 말했다. 하지만 ‘비르투(Virtu)’도 말했다. 비르투는 인간의 의지, 정신, 결단력이다.

 

운명은 절반밖에 사태를 지배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절반을 얼마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돌파하느냐는 것이다. 운명과 조건이 불리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환경과 여건을 제압하고 극복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이다.

단순한 정신력과 인내, 그런 것을 말함이 아니다. 인간이 기울일 수 있는 인위적 노력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통해서 군주가 중심이 되어 인간들의 인위적 노력으로 안전과 생존을 도모해보자고 생각한 것 같다. 한비자도 ‘자연의 세(勢)’와 ‘인위(人爲)의 세(勢)’를 이야기했을 때, 마키아벨리와 흡사한 말을 했었다. 주어진 여건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가고 개선시켜가는 상황과 조건을 말했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사상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기는 절대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다. 위기가 일상화된 시기이다. 그리고 그가 살던 나라는 강대국이란 공간이 아니다. 약소국(弱小國)이란 공간이며, 약소국이 외세에 시달리는 환경에서 살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비상한 시기, 약소국, 강대국들의 횡포란 환경이 만들어낸 그에 대응한 정치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둘 다 절박한 여건이 강제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환경, 비슷한 절박함, 그러니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공통된 부분이 참 많은데, 그중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정치에서 도덕, 윤리, 종교라는 외피(外皮)를 제거했다는 점에 있다. 아니 외피를 제거했다기보다는 면사포(面紗布)를 찢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대저 어린아이가 서로 장난치며 놀 적에 흙을 밥이라 하고 진흙을 국이라 하며 나무를 고기라 한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면 반드시 집에 돌아가 밥을 먹는 것은 흙밥과 진흙국은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저 오랜 옛날의 전설과 기리는 말을 외는 것은 말뿐으로 정성이 담기지 않았으며 선왕(先王)의 인의(仁義)를 말하더라도 나라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이 또한 놀이가 될 수는 있어도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비자》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 편]

 

한비자가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을 가지고 유가(儒家)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다.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데 이게 밥이야 국이야 반찬이야 해도 그걸 가지고 놀기만 하지 입에 대고 먹는 경우는 없다. 어린아이들도 안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라는 것을. 집에 와선 진짜 밥과 국을 따로 먹고 잠에 드는데, 유가가 말하는 도덕과 인(仁), 의(義), 예(禮)는 모두 좋은 말이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소꿉장난에 쓰는 소품(小品)과 같은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나라를 반드시 살리고, 반드시 강하게 해야 하기에 도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때론 비(非)도덕적, 반(反)도덕적 방법도 써야 한다. 환자에게 극약 처방을 하듯이 말이다. 도덕은 도덕이고, 종교는 종교고, 정치는 정치다. 정치에서 도덕과 종교로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둘의 생각이 그 점에서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비도덕적이거나 반도덕적인 인물일까? 그들이 비도덕적·반도덕적 행위를 권장했을까?

 

그렇지 않다. 한비자도 마키아벨리도 도덕·윤리 그 자체를 부인한 인물이 아니다. 커다란 위기라는 상황과 조건하에서 도덕이라는 것이 통할 수 없기에 쓰지 말자는 것이다. 위기에서는 기존 상식과 도덕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가 필요하고, 그걸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도덕에 매몰되어선 정치가 아니다.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정치를 볼 수 있고 진짜 정치가 행해진다. 그 유사함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그것에 주목해야 두 사람에 대해 제대로 이해가 된다.

 

과학으로서의 정치학

 

정치 사실주의, 정치 행동주의, 국가 이성주의(理性主義), 인간 비관주의(悲觀主義), 정치 최소주의(最小主義), 결과주의, 역사학자로서의 자의식, 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추구해야 할 당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사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적극적 행동과 의지로 조건과 상황을 타개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 그리고 어설픈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배격하고 철저한 성악설적(性惡說的) 인간관을 전제한다는 점, 정치에서의 선택은 이상주의적인 최선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최소주의적 접근(minimalist)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점 등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에는 비슷한 부분이 매우 많다. 앞으로 둘의 공통점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정치학의 발견, 과학으로서 정치학 이야기만 하면서 정리해보자.

 

마키아벨리와 한비자에게 정치란 도덕적 가치, 신(神)의 섭리, 종교적 이상(理想) 등과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정치가 초월자(超越者)의 의지를 실현해야 하는 것인가? 과거 성인(聖人) 군주가 펼쳤다는 이념과 도덕을 다시 한 번 재현하라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주장해도 될 정도로 당대에 둘이 처해 있던 상황이 한가했나?

 

신의 의지, 책 속에 있는 성현(聖賢)의 고귀한 이상, 윤리적 규범의 실현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치란 국내 정치든 국제 정치든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싸우는 장(場)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권력을 획득하고 지키고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정치의 장에서 실천되어야 할 이상과 이념을 따지면 안 된다. 마키아벨리와 한비자의 생각이 그러했다. 정치가 실현해야 할 도덕과 이념, 윤리적 당위(當爲)를 따지고 논하면 사실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것을 알아야, 무엇을 반드시 지키고 준수해야 권력을 두고 벌이는 투쟁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규칙성에 가까운 사항들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실제로 정치의 장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관찰·분석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앞으로 벌어지고 추구해야 할 이상적 당위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들을 잘 보고 관찰해 권력을 얻고 방어하는 데 반드시 통할 수 있는 틀림없는 법칙들을 말해야 한다. 그게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생각이고, 그래야 정치학인 것이다.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시키고 권력 획득과 유지, 행사를 위한 필연적인 기술과 법칙을 제시해야 제대로 된 정치학이다. 동양은 한비자 덕분에, 서양은 마키아벨리 덕분에 정치학이란 것이 탄생했고, 정치가 제대로 논의되었다고 할수 있다.

 

사실 어쩌면 그들은 자연과학과 유사한 정치학을 말한 것일 수도 있는데,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추구해야 진짜 정치학이 아닌가 싶다. 정치를 말하면서 ‘이런 것을 하면 좋겠다’ ‘이런 세상 만들면 좋겠다’가 아니라 ‘정치의 본질적 속성과 구조가 이러하니 반드시 이런 법칙들을 알고 준수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정치학이다. 유교적으로 접근하는, 혹은 서구(西歐) 중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접근하는 정치는 정치학이라고 볼 수 없다.

 

좋은 정치인이란?

 

두 사람의 텍스트를 차근차근 읽어 보면 모두 의사(醫師)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외과의사 생각이 나게 한다. 정치를 하는 이가 가져야 할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익혀야 할 기술과 기교에 대해서 논한다. 대상의 위험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제시한다. 반드시 대상이 살게 하는 법을 말한다. 그리고 인체구조와 병에 대한 법칙을 아는 것처럼 권력의 구조, 흥망성쇠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들은 대상을 구하고 살리는 기술만 말해줄 뿐이다. 차갑고 냉정하게 말이다.

 

그들이 비판·비난하는 왕은 나쁜 왕이 아니다. 나빠서 욕하는 게 아니라 과오(過誤)를 범했기에, 과오를 범해 실패했기에 비판한다. 칭찬하는 왕은 착하고 도덕적인 군주라, 성군(聖君)이라 치켜세우는 게 아니다. 틀림없이 기술을 그대로 발휘하고 실수가 없기에 칭찬하는 것이다. 훌륭한 외과의사의 예를 드는 것과 같다. 사람이 좋고 착한 의사가 훌륭한 의사일까?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좋은 의사일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병을 고치고 국가를 생존하게 하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일 뿐이다.

 

志士 마키아벨리와 한비자

 

앞서 중원이 종횡가와 법가를 낳았다고 했다. 소진과 장의, 이사, 오기, 상앙 등 그들 모두가 본국 밖으로 떠돌아다녔다. 고국의 힘이 강하지도 않고, 조국의 체급이 자신의 웅지(雄志)를 펼치기엔 작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들은 모두 밖으로 향했는데, 한비자는 그들과 달리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무정주(士無定主)’라고 했다. ‘선비에게는 고정된 주인이 없다’는 뜻이다. ‘철륜천하(鐵輪天下)’라는 말도 있었다. 철제 바퀴가 달린 수레를 타고 지식인들은 진나라,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 등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더 비싸게 사줄 군주가 있으면 어디든 가서 자신의 재능을 팔았다.

 

 

한비자는 달랐다. 조국(祖國) 관념이 없던 당대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조국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한비자》를 읽다 보면 정서적인 교감(交感)과 공감(共感)이 묘하게 일어난다. 한국인들이 《한비자》 텍스트를 읽다 보면 느끼게 되는 감정선(感情線)이 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국가란 그냥 단순히 태어나 자란 사회일까? 아니다. ‘모국(母國)’과 ‘조국’이란 단어는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이다. 그래서 한비자가 가진 조국에 대한 사랑, 끝까지 한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려고 했고 조국을 살리기 위해 진(秦)에 가서 죽어야 했던 지사적(志士的)인 측면을 보면 한국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의 땅 한반도도 일찍이 고난의 땅 아니었는가? 그리고 많은 지사가 고난의 시기에 활약을 했고…. 그래서일까 한비자의 텍스트들을 보면 정작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한국인들에게 더 큰 울림과 공감을 주는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런 측면이 있다. 마키아벨리도 한비자처럼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 그는 “나는 내 영혼보다 조국 피렌체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부에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버텼고, 재기의 희망이 없는 가운데에서 《로마사논고》를 쓰고, 청년들을 가르치며 미래를 기약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정치(精緻)한 이론, 개념, 문제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에게 어떤 진심과 진정성이 있었기에 대사상가가 되었고, 늘 현실로 소환(召還)되는 것일까? 철학가와 사상가에게 사유의 깊이와 넓이, 이론의 개성(個性)과 독창성, 밀도(密度)와 체계(體系) 그런 것 못지않게 그가 지닌 진심과 열정, 사랑이 더 우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新냉전시대 생존전략

 

자, 한비자와 마키아벨리 이야기를 하면서 대외적 환경을 이야기했는데, 현재 한국의 대외적 환경도 무척이나 어수선하다. 불확실성(不確實性)과 복잡성(複雜性)이 커져가고 있다. 안으로 내정(內政)의 문란(紊亂) 말고도 대외적 환경에서 커다란 변화의 파도가 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다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른바 탈냉전(脫冷戰) 시대에서 신냉전(新冷戰) 시대로 간다고들 한다.

 

그 때문에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과 일본이 중거리미사일 배치 협의를 시작했고, 이에 중국과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원인 제공은 자신들이 해왔으면서 으름장을 놓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태도를 보이는 실정이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미사일 배치와 관련해 한국에 협박과 경고를 해대고 있다.

 

한국은 지금 내정의 난맥상보다 신냉전 시대로 가고 있는 대외적 환경의 불확실성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국내 정치인들과 엘리트들에게 어떤 대안이 있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난 여기서 그저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일단 잠깐 숨을 고르고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를 읽어보자”고. “우리가 사는 나라가 다시 고난의 운명에 편입되고 있는 거 같은데, 고난의 땅에서 만들어진 사상가의 이야기를 경청해가면서 준비를 해보자”고 말이다.

 

우리도 ‘반드시(必)’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길, 반드시 번영의 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길, 반드시 후세대들이 부강한 나라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길 말이다. 신냉전 시대이기에 우리는 마키아벨리와 한비자의 통찰을 더욱 경청해야 하기에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공통된 그들의 통찰, 우리에게 필요한 그들의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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