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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성의 이중성  

현대일본은 성(性) 자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담대하다. 일본에서는 부녀, 모자지간에도 영상물의 성적인 장면을 보아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며, 사촌끼리도 결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의식은 도덕적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뒤에 성의 신성함과 생명력에 대한 상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고대의 성문화는 비교적 자유롭고 남녀가 동등하게 솔직한 사랑의 고백을 통하여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중세에 들어와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불교대중화의 영향으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의 죄가 깊기 때문이라는 의식의 전파와 함께, 여성을 터부시하게 되면서 남성우위의 사회형태로 전환되었다. 

남성이 절대적 우위에 서자 여성의 지위도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었고, 여성의 역할 또한 출산을 위한 것으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근세 유교사회에 들어오면서 유교적 도덕관념에 의한 남녀구별은 더욱 뚜렷해져 이른바 삼종지도(三從之道 : 여자가 지켜야 할 3가지 도로,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는 것) 라는 의식 아래 가문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정조와 정절을 지키는 여인상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배계층의 인식과는 달리 시민사회는 풍부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전히 유곽 등이 존재하였고 남성의 성은 자유로운 것이었다. 즉 남성들은 집안에서는 조숙한 아내를 거느리면서도 유흥으로서의 성이라는 양면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한편 농촌의 성문화는 또 색다른 것이었다. 마을 청년이 밤에 자유롭게 처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때는 성관계와 결혼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고가 만연하였기 때문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마을의 청년들이 밤에 몰래 딸의 방에 찾아오는 것을 방관했다. 

오히려 밤에 딸을 찾아오는 청년이 없을 경우 부모들은 걱정하였다고 한다. 즉 과거의 성관계는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남녀 혼욕을 즐겼는데, 온천에는 아직까지 혼탕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은 근대 메이지 정부에 들어와서는 문명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근절하고자 노력하였다.

근대 들어 서구의 자유연애 풍조는 일본의 남녀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성문화는 경제적 발전과 상당부분 연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놀랄만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오늘날의 선진대국 일본이 있기까지는 문란한 성의식을 가진 일본 여성들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어떻게 힘이 될 수 있었는지, 먼저 역사적 시대별로 살펴보면, 나라 시대를 거쳐 헤이안 시대를 지나는 동안 일본은 귀족사회에서 무사정치 시대로 바뀌면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남자들의 수는 감소하게 되었고, 일본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종족 번식을 위해 남자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때는 성관계의 불편을 덜기 위해 기모노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무사정치 시대가 가고 메이지유신 시대가 되면서, 어려운 국내 사정으로 인해 또다시 일본 여성들은 해외로 외화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을 가라유키라고 하는데 많은 외화를 벌어 들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제재를 가하였으나 뒤에서는 오히려 이것을 부추기고 장려하였다. 

이러한 가라유키들을 중심으로, 각국의 항구마다 일본인 촌이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대일무역이 급증하여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히 일본 무역은 번성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러일전쟁 때는, 그들의 곁에 있던 남자들을 동남아 항구에 배치받도록 하여, 러시아 함대가 보이면 일본 군부대에 통보 할 수 있도록 정보망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활동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일본에서의 실상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전쟁 미망인들이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 생계를 이루면서 살아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1950, 60년대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일본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정책으로, 여성들은 불철주야 공장에서 일에만 매달렸고 그 결과 경공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만약 먹고 살기 위해 기름때도 마다하지 않은 일본 여성들의 피땀어린 노동이 없었다면,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같이 일본 여성들은, 그 옛날 일본 역사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는 몸을 팔았고, 기름밥을 먹으며 스스로 시금석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여성들은 옛날이나 지금도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여성의 특이한 점은 본분을 잘 지킨다는 것이다. 아무리 처녀시절에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해도 일단 어머니가 되면, 그때부터 나를 버리고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다. 

전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정숙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 소박한 주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주부들은 처녀시절 유명 브랜드만 걸쳤던 여성이라 할지라도 결혼 후에는 여간해서 충동구매를 하지 않으며 사야 될 물건을 꼼꼼하게 메모해두었다가 한꺼번에 산다. 

또한 대부분의 주부들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성으로서의 쾌락적 도식과는 별개 문제이다. 남자와의 관계가 복잡하다고 해서 주부의 자리까지도 내팽개치는 일본 여성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일본 여성들은 문란한 성생활 속에서도 일단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정숙한 아내, 어진 어머니의 모습이 되어 현재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이것이 바로 일본 여성들의 두 얼굴, 즉 천박함과 고상함인 것이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이며 마지막 금요일을 맞이합니다. 3일남은 2017년을 잘 마무리 하는 뜻있는 날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박철효 박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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